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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에의 노래 – 감독판 3시간은 너무 길다

영화

by 페이퍼무비 2023. 12. 2.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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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을 올리지 못하는 희생자를 서투르게 토닥이며 6/10

 

(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후기입니다)

 

 

 

 2011의 오사카를 배경으로 눈속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하며 2명이 눈 속을 걷고 있다. 그리고 화면은 전환되며 어린 아이를 비춘다. 우리는 그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가난한 아이이며 결식 아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 아이는 말을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점으로 비추어 보아 그 어린 아이가 성인이 도쿄에 와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도쿄에 올라와서 길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과거 자신의 누나의 남자 친구였던 시오미 나츠히코가 연결시켜준 ()마와리, ()잇코와 재회하게 된다.

 

 마와리의 과외 선생님 시오미 나츠히코는 과거 루카의 누나 키리에와 사귀었으며 그녀와 아이까지 가지고 약혼한 사이였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키리에가 죽고 그녀의 동생 루카만이 남아버린다. 지진 이후 스스로 키리에가 죽어서 안도하는 동시에 이 안도감에 스스로 자책하고 못난 놈이라고 생각한다. 그 죄책감에 그는 루카를 돌보려고 하지만 나라의 법에 의해 그는 그녀를 보호 할 수도, 어디로 갔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루카가 그와 연결이 되자 루카와 나츠히코는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그 사이에 자신이 일을 하게 된 곳의 사장님의 부탁으로 과외 일을 하게 되었고 그 때 만난게 마와리이다. 마와리와 루카를 소개시켜주고 그들은 친해졌으며 이후 루카는 자신의 꿈을 위해 그냥 도쿄에 상경하였으며 이츠코도 도쿄 대학을 합격하여 올라왔지만 어떻게 된 건지 그녀도 남자들의 집에서 집으로 이사를 하면도 돌아다니던 중 둘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키리에가 유명한 가수가 되기를 바라면서 마오리는 그녀의 매니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키리에와 잇코 모두 서로 본명을 버린 사람들이다. 이름도, 고향도 버린 두 사람의 이야기로 계속해서 진행하고 버스킹 여행을 하고 다닌다. 영화를 보다 보면 여러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녀와 부랑자 기타리스트 아저씨는 <어거스트 러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면서 위로 라는 측면에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생각이 나며 음악적 부분에서는 <비긴 어게인>처럼 보이기도 하다.

키리에가 어린 시절, 루카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말은 하지 못하지만 노래는 가능하다는 신기한 상황이며 이를 통해 무언가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음색이 스모키하고 강렬한 음색에 부드러운 클래식 기타가 신기한 조합이다. 하지만 음향 녹음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레코딩에서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음악은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다.

 

 문제는 노래가 아닌 영화의 스토리에 있으며 위기도 없는데 위로도 없으며 몰입도 서사도 전달력도 다 낮다. 전개가 갑자기 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 이상으로는 우연에 우연이 낳은 드라마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친 오빠 같은 사람에게 연락도 없이 그냥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 그렇게 찍는데 한번도 본인 추천 영상에 나오지 않았을까? 분명 위로하는 영화라고 하였지만 위로라고 하기에는 인물들의 깊은 서사가 필요하며 위로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넣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루어 내지 못하였다. 이처럼 재난을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영화들은 많이 있으며 한국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재난 영화, 특히 같은 동일본 대지진을 그리고 위로하는 작품은 <너의 이름은>이 있다.

 

 <너의 이름은>의 경우는 인물들의 깊이 있는 이야기를 그리는 동시에 그들이 겪어야만 하였던 재난을 과거와 현재를 이음으로써 극복하고 인물들 또한 재난과 그들의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 낸 좋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위로를 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위로 받은 사람은 없는 영화다. 등장인물들끼리 화해를 하면 모르겠지만 관객들까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이를 정말 위로하고 싶었다면 위로와 극복을 동시에 보여주어야만 관객들에게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안아주는 것이 감독의 기량의 한계였던 것을 보인다. 게다가 후반에 가서는 힘이 점점 떨어지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게 느껴진다. 이렇게 이야기들을 줄줄이 풀어 나아가기에는 3시간은 너무 지루하며 개연성도 떨어진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1개만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야지 어울린다. 그는 다초점에는 취약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감독 양반

 

 필자는 2시간 짜리를 보지 않아 감히 예상하지는 못하지만 더 개연성이 떨어질 수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반대로 시간을 축약함으로써 필요 없는 부분을 제거한 더욱 좋은 작품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본 건 일본의 3시간 감독판이었다. 그래서 상당히 필요하지 않는 이야기와 단순히 개연성을 위해서 넣은 장면들이 다수 있다. 그래서 2시간으로 줄인 거라면 그냥 깔끔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마와리를 없애야지 이야기가 더욱 위로에 집중이 될 것이다. 이런 필요 없는 거 빼고 덜어내고 나아가야지 모든지 손에 가득 쥐고 나아가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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