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많은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름모를 자들의 속죄 6/10
(이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후기입니다)
영화의 시작에서는 미국 텍사스주와 멕시코 국경을 보여주는 것인데 왜 <데드 랜드>라고 불리는 것일까? 주인공은 두 나라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선을 관리하는 인물이다. 그는 순찰을 하는 중에 의식을 잃은 한 멕시코 남자를 발견한다. 이미 익사한 것이라고 예상하여 가방에 넣어 옮기던 중 그가 갑자기 가방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그를 엘 파소로 데려가 경찰서에 그를 구금한다. 그를 구금한 와중에 그의 아버지가 탈출했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의 자택에 돌아간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 두 경찰의 심한 언쟁 중에 사고로 남자를 죽이고 만다. 그들은 혼란에 빠지지만 그 시체를 치우자 다시 그가 완전한 상태도 등장한다. 그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와중에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남자를 찾아온 형사들도 존재한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해서 부활하는 남자만을 제치고 점점 사람들은 죽어 나간다.
우선 영화는 심오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하고 있으며 그 틀은 마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를 담고 있는 메시지는 더욱 두리뭉실하게 그려져 있다. 이처럼 결말부에서 알게 되는 것은 계속해서 살아서 돌아온 남자는 사실 주인공의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이는 무언가를 분명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 있을 것이지만 상당히 두리뭉실하게 그려져 있어서 관객들이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의문은 과거 형사들에게 죽음을 당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살아 있으며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으로 나뉘어 있으며 과거의 자신은 같은 나이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살아나고 있지만 현재의 자신은 나이를 먹었지만 정신은 점점 잃어가기 시작한다.
필자의 가벼운 해석을 해 보자면 결말부에 그 남자가 아버지라고 나오는 것에는 충격보다는 의문을 표하게 된다. 아버지는 분명 나이를 먹고 있지만 정신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젊은 육체는 과거에 잡혀 있으며 현재에 와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죽어도 그는 되살아난다. 이는 과거의 정신적 죽음은 현재에 와서도 계속해서 부활하고 있지만 육체는 시간의 흐름을 받지만 과거의 정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정신은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젊은 모습의 아버지는 정신과 육체는 무한이라는 과정에 사로잡혀 있지만 나이를 먹은 아버지는 육체는 시간과 같이 흘러가지만 정신은 과거에 이미 죽음에 이르렀기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주인공의 꿈 속에서 얼핏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 해석하는 재미도 있지만 동시에 답답함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구멍이 있는, 비어 있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호평이 될 수도 있고 혹평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추후 감독판으로 조금 더 디테일한 설정들이나 장면들을 추가해 준다면 영화의 퀄리티가 더욱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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