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의 방황에서의 충돌, 그리고 약간의 신파 7/10
(이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후기입니다)
감독 켄 로치는 계속해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대변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계속해서 작품 그리고 스크린으로 옮겨왔다. 개인적으로 2016년 개봉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미안해요, 리키>를 통해 사회의 약자들의 시선을 대변하여 관객들에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작품 <나의 올드 오크>에서는 한 명, 한 가족에서 한 마을까지 넓은 범위로 점차 시선을 넓히는 동시에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그의 시선을 비춰주고 있다.
영화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2명으로 술집 올드 오크의 주인인 발렌타인과 이민자 출신의 야라이다. 그 두 인물은 완전히 반대 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단골들의 매출에 의존하여 운영하고 있는 술집이며 그는 이 마을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야라는 오자마자 카메라가 부셔지는 등 오자마나 그 마을에서 외부인 취급을 받는 난민이다. 그렇게 반대되는 입장의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이유는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죽어가는 마을의 번영을 위해서이다. 발렌타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마을이 죽어가기를 원치 않아 사람들이 와서 음식을 무료로 먹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야라의 경우는 마을에 적응하여 그들과 함께 공존하기를 원해서이다. 물론 이 둘이 처음부터 목적이 일치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변화점은 아마 발렌타인이 자신이 아끼는 강아지 ‘마라’가 죽음을 당한 다음 야라가 찾아온 그 시점일 것이다. 본인이 가장 힘든 때에 우연히 만난 강아지 마라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존재였다. 심지어 단어 마라 는 본인, 내 친구 그리고 나를 지켜주는 사람 등 광산 마을에 있어 중요한 단어였던 만큼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마라가 죽음을 당한 후 너무나도 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야라와 그녀의 어머니가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준다. 이는 야라 또한 상실의 슬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그가 공동체를 위해 발벗고 나서게 되는 가장 큰 계기로 움직인다.
북동부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그들이 사용하는 발음은 정장을 빼 입고 나오는 인물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런던 발음이 아니다. 아일랜드식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환경이 런던만큼의 자본과 여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광산에 의존하고 있었던 마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군부대나 대학들이 소멸하는 마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자본이 없는 환경에 이민자들을 넣는 일이다. 발렌타인의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마을에 그냥 이민자들이 들어왔을 뿐이라고 언급한다. 이미 무너진 마을에 이민자들을 넣어 오히려 그들을 더욱 혐오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모습에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도 이미 이민자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시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최근 공사 현장에서는 배식에 돼지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시골에서는 이제는 다문화 가정이 아니면 따돌림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이들과 함께 공존하고 융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했을 때 떠오르는 해결법은 많이 없다. 한국은 선진국 중에서도 이민자를 적게 받기로 유명한 국가이다. 이미 출산율 0.7이 파괴된 전세계 사회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지금까지 유래 없는 스스로 소멸하고 있는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약간의 신파를 통해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는 과연 가능할지 필자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만약 한국에서 자신의 집값이 1/5 가격으로 떨어지고 마을의 중심이었던 군부대, 군대 혹은 교도소는 이미 사라졌으며 전쟁 난민들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그들이 불쌍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연민은 현실의 괴로움에 뒤덮여 그들을 이해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이는 한국을 예로 들었을 뿐 세계적 문제이기도 하다. 상실과 괴로움의 시대에 다른 이가 아닌 자신부터 지키기 급급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감싸줄 수 있고 감싸야 하는 생각을 발현시킬 어른의 등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술집 올드 오크처럼 자신의 것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이를 망가트리는 문제를 초래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이며 이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요보다는 설득을, 상대방을 위한 이해를, 서로를 위한 공감이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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