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셰프
꾸역 꾸역 관객에게 먹이는 감독의 맛있고 날카로운 연출들의 향연 7.5/10
(이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후기입니다)
스스로 셰프와 친하다는 한물 간 배우, 몇 번이고 셰프의 레스토랑에 방문한 부자 부부, 그리고 음식 평론가들과 허세 부리기 위해 온 3명의 남자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한 사람들은 섬의 자연을 살펴보면서 감탄한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스텝들이 머무는 숙소를 보여주는데 그곳은 마치 군대와도 같은 공간이었다. 공간을 살펴보면 영화 [풀 메탈 자켓](1996)에서 훈련을 받는 장면들에서 보여주는 시설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바로 호손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데 호손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들은 점점 사회와, 외부와 단절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가 있다면 그것은 중반부에 불평하는 손님을 향해 직원이 귀에 속삭이는 대사 [너의 욕심보다는 적게 먹고 너의 주제보다는 많이 먹을 것이다] 일 것이다.
이 대사를 나눠본다면 ‘욕심’과 ‘주제’로 나뉜다. 셰프 슬로윅이 부른 손님 한명 한명은 자신의 ‘주제’를 객관화를 못하고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메뉴에 ‘주제’ 파악 못하는, ‘욕심’만 가득한 그들이야 말로 메뉴의 재료로 충분했던 것이다. 자신의 본질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며 자신이 필요한 것 그 이상을 누리며 그것은 자신의 실력과 노력이라 착각하며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린다. 물론 그 화살은 셰프에게도 향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여섯번째 코스인 ‘남자의 어리석음’에서 알 수 있다. 부주방장 캐서린은 앞으로 나와 자신을 겁탈하려고 한 셰프 슬로윅의 허벅지를 작은 가위로 찌른 뒤 슬로윅은 캐서린에게 사과 한다. 이걸로 셰프도 자신의 ‘주제’를 벋어난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처벌을 받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또한 요리와 코스의 재료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슬로윅이 각각의 재료를 깊이 이해하는 셰프라고 칭찬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손님 조차도 그 음식, 그리고 메뉴를 완성시키는데 중요한 재료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바뀐 손님, 마고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셰프는 마고에게 묻는다. 주는 사람(Giver)이 되고 싶은지, 혹은 받는 사람(Taker)이 되고 싶은지를 말이다. 그렇게 보면 타일러가 왜 셰프에게 무시당하는지 알 수 있다. 왜냐면 그는 받는(Taker) 입장에서 그냥 순전히 즐길 줄 알아야 하지만 주는 측(GIver)을 이해하는 듯이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한테 요리를 직접 해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는 요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말이지 누가 봐도 먹을 만하지 못하는 요리를 내놓자, 요리 이름이 제목이 ‘타일러의 개소리’ 인 시점에서 그는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는 사람인 ‘주제’에 주는 사람과의 경계선을 흐린, 각자의 역할의 범주를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처벌을 받는다. 이렇게 평론가 릴리언 블룸은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남을 평가하는 ‘주제’넘는 행동, 자신의 직업인 배우에 충실하지 못한 배우 조지 디아즈, 몇 십번이나 레스토랑에 왔지만 성실히 음식을 느끼고 감사하지 못한 부유한 상류층 리처드 리브랜트, 그리고 자신의 ‘주제’이상으로 ‘욕심’을 부린 3명의 남자들 등이 자신의 ‘주제’에 맞지 않게 ‘욕심’을 부려 재료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와 다르게 유일하게 살아 남은 인물 마고는 왜 살아 남았을까. 영화의 시작부터 마고는 요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 요리가 나올 때 부터 그녀는 계속해서 이게 뭔가 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그리고 그 불만은 쌓여가 결국에는 셰프에게 직접 따지는 형국까지 가버린다. 셰프에게 ‘그럼 손님을 만족시키고 배불리 먹이지 않는 너는 셰프라는 직업에 충실하냐’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 자체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채찍같은 박수로 가르치려고 드는 너는 셰프라는 ‘주제’를 벗어나 손님을 대상으로 ‘욕심’을 부리는게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셰프의 욕심이 손님들보다 덜 하거나 더 한다고 해서 그들의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셰프의 ‘욕심’ 이상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손님들은 결국 그의 요리와 코스의 재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마고, 아니 에린 만이 그녀 스스로를 객관화 하였으며 스스로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그 위치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치즈버거와 함께 그 섬에서 달아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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