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 (2022)
출렁이는 배 위에서 보는 감독의 날 서린 슬픔의 삼각형. (7/10)
(이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후기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발칙한 영화를 보았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평등과 공평을 주장하지만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이 영화는 처음의 남녀 관계에서의 평등하게 해야 한다는,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을 벗어나서 평등하게 서로를 대해야 한다는 대사로 우리들을 그 주제로 초대한다.
영화는 크게 3개의 챕터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여러 모델로 활약을 하고 싶은 젊은 남자들을 비추면서 이야기한다. 그들을 하나하나 인터뷰 하던 도중 인터뷰어는 너는 어떤 모델이 되고 싶냐고 물어본다. 도도새? 혹은 공작? 그리고 그에 대해 모델이 의문을 표하자 인터뷰어는 비싼 옷을 입고 사람들을 내려다 보면서 그들에게 다가오지 말라, 너는 감히 나를 가질 수 없다라는 얼굴을 하고싶은지. 혹은 그들에게 선한 미소를 보내면서 우리는 가벼워요 그리고 너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 라고 보여주는 미소를 전한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엿을 날리는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도 않는데 그들에게 마치 그러한 듯이 착각을 시키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대사에서는 평범한 커플들이 가지고 있는 사소한 대화와 다툼으로 시작한다. 여자 모델인 여자친구가 더 돈을 많이 버는 상황에서 그녀보다 못 버는 남자 모델인 주인공이 서로 누가 돈을 내야 하는지 다툰다. 남자는 전날에 여자가 내기로 했지만 영수증이 나오자 그것을 보지도 않고 ‘고마워 자기’라면서 마치 남자가 내는 듯이 말을 한 것에 남자는 화를 낸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영수증이 나온 것을 알고 남자를 자신이 결혼을 해도 괜찮은지, 혹은 같이 아이를 키워도 괜찮은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 남자를 테스트 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남자는 자신은 평동하고 싶다면서 그녀에게 주장하지만 남자를 포함에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한 것이다. 과연 평등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의 입장에서 평등할 수 있는가.
다음 챕터 2인 배 위에서는 감독이 전달하고 비판하고 싶은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전달한다. 처음에 배 위의 승무원들은 처음부터 돈! 돈! 돈! 이라면서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그들에게서 막대한 팁이나 받을 생각을 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와 생각은 단순히 돈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에 돈이라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철학이다. 비록 부자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이 하고 있느냐 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스스로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러시아 부자가 계속해서 승무원을 쪼자, 그들은 꼬리를 내리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들이 아무리 돈을 원하고 희망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돈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었던 자유 의지마저 러시아 갑부들에게 팔아 넘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갑부가 개인적인 불만을 승무원이나 선장에게 말한다. 그것은 바로 돛이 너무 더럽다는 것. 하지만 선장은 이 배는 모터로 가기 때문에 돛이 없다고 부정한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해서 그럴리가 없다면서 계속해서 돛을 청소해 주기를 바란다. 생각해보면 돛은 속도나 방향을 조종할 때 사용된다. 그 배 자체가 여자가 생각하기에 옳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여자의 말을 부정하는 선장은 자신만의 철학을 세워 앞으로 꾿꾿히 나아가고 있다. 그러한 선장과 함께하는 만찬의 자리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선장이 고른 날이 하필 저기압이기에 배가 엄청나게 요동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는 음식을 부자들은 꾸역꾸역 돼지처럼 먹는다. 심지어는 음식을 먹고 토를 하는 사람들이 속출 함에도 불구하고 승무원들은 오히려 빈속이면 멀미가 더 심해질 수 있다면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음식과 음료를 제안하고 먹인다. 심지어는 토를 하는 사람이 샴페인을 요구하자 승무원이 물을 추천하지만 그 제안을 무시하고 다시 샴페인을 꾸역꾸역 먹는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 종일 토를 하고 변기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배는 더더욱 심각하게 흔들린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 2명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선장인 토마스 스미스와 러시아 갑부인 드리트리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토를 하면서 쓰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남아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의 사상을 뒷받침 해주는 명언 배틀을 펼치기 시작한다. 서로의 사상을 이야기 하는데 단순히 요약하자면 러시아 자본주의자와 미국 사회주의자의 사상 토론이다. 그러한 토론 중에 심지어는 전기도 끊기며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밤을 보낸다. 그리고 그들을 플래쉬로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난민이나 노숙자의 다큐멘터리와 같이 연출한게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날이 밝자 그 배를 노리는 해적들, 제 3의 세력들의 출연에 의해 두 사상 모두 바다 아래로 가라 앉는다. 이러한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배가 요동쳐도 문제 없이 나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도 그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장면을 보면서 너무 직설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감독의 생각을 그리고 사상을 관객들에게 깊이 주입시켜보려는 것은 알겠으나, 너무 직설적이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거나 피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토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건 그들의 탐욕이 잘못되었거나 그들이 저지른 탈세나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처벌이 아닌 감독이 그들을 보면서 단순히 기분이 나빠 토를 하고 싶을 정도라고 보여주는게 아닐까 싶다. [어벤져스 2편]의 악당 울트론은 어벤져스를(정확히는 캡틴 아메리카를) 보면서 ‘I can’t physically throw up in my mouth, but…’ 번역하면 ‘내가 육체적으로 토를 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라는 대사이다. 마치 이 대사처럼 감독은 현실의 갑부들이 토를 하게 할 수는 없지만 영화속의 갑부들이 토를 하는 장면으로 자신의 이상에 만족하는 장면은 너무 직설적이며 조금은 노골적인 면이 보인다.
대망의 쳅터 3에서 해적의 침략에 의해 폭발한 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탈출해서 무인도에 도착한다.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엄청난 재력과 권력, 그리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섬에 도착하자 그들의 신분을 받쳐 줄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던 도중 구조배에 탑승하여 탈출한 배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던 에비게일이 구명선을 타고 섬에 도착한다. 에비게일은 처음에 단순히 물과 과자를 가져온 사람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만이 사냥을 할 수 있고, 요리를 할 수 있고, 불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음식을 그들에게 배분하지만 그녀의 음식만 한 가득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왜 평등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그러한 의문에 그녀는 자신이 가장 많이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것이 공평하지 않냐는 그녀의 눈빛이 그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한 권력을 사용하여 자신을 새로운 캡틴이라고 여기게 끔 그들을 음식으로 조련한다. 그러한 조련 과정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심지어는 드리트리는 ‘능력에 맞게 일하고 자신의 위치에 맞게 받으면 좋지’ 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아부를 한다. 에비게일의 힘은 점점 더 커져 주인공 칼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 불러온다. 에비게일은 칼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고는 말 하지만 매번 그녀가 칼에게 과자와 편안한 잠자리를 주는 시점에서 아무리 강요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매번 거절할 수 없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칼의 여자친구 야야가 그에게 질투한다. 반대로 보면 챕터 1과 2에서 계속해서 칼은 야야보다 낮은 위치에 존재했다. 그녀의 비위에 맞추고 그녀의 사진을 찍고 계속해서 그녀의 보좌 역할을 했지만 이 섬에 오고 에비게일의 눈에 들어온 시점부터 칼은 야야보다 가치가 더 높아졌다. 그러한 점을 야야는 질투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에비게일과 야야가 근처 리조트를 찾아내고 기존의 사회에 돌아가려는 순간 에비게일은 야야를 죽이려고 한다. 에비게일은 자신의 왕국에서 살아 왕으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기존의 사회를 찾자 그녀는 절망한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비밀을 지킬 것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다시 사회에 돌아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보다 옳고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시작한 신나는 노래를 배경으로 야야와 에비게일이 오른 길을 칼이 뛰어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여기서 필자의 의문은 과연 선장은 반드시 죽었어야 하는 것인가 이다. 섬에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만약 선장이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선장이 살아 있음에도 에비게일은 캡틴이 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선장이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에비게일에 붙어 선장을 몰아 붙인 다음 오히려 너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독이라면서 그를 멀리 귀양을 보냈을 것이다. 왜냐면 챕터 2에서 보여준 듯이 캡틴 토마스는 마르크스주의로 절대적인 평등을 계속해서 외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크레딧이 다 올라간 다음 그들이 귀양을 보낸 토마스가 그 위의 리조트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장면으로 끝냈으면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사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 영화적 연출면에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영화 미스트의 결말에서 영향을 받은 의견입니다). 영화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대사들과 연출로 관객들에게 감독의 메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너무 날카로운 탓에 관객은 오히려 지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연출을 박찬호 감독님의 [복수 3부작]이 떠올랐다. 만약 그러한 연출과 느낌을 좋아하신다면 [복수 3부작]을, 그리고 이러한 영화의 메세지를 좋아하신다면 [기생충], [더 플랫폼], 그리고 [더 셰프]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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