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파트 2 – 포트폴리오 준비준비의 중요성
영웅의 탄생을 억눌린 이로 깨물며 7/10
(이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후기입니다)
이번 영화를 관람하시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듄 파트 1>을 관람 한 후 시청하시는 분들이라고 믿는다. 사실 파트 1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줄거리만을 읽고 가도 <듄 파트 2>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우리들이 계속해서 봐 왔던 영웅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듄은 단순히 영웅의 탄생 이야기 이상으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종교의 시작과 발생의 시작점을 관찰했다는 상당히 자극적이고 민감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듄 :파트 1>의 경우 <듄 시리즈>를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에 감독의 취향이 많이 빠진, 대중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듄 시리즈>를 모르는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듄 시리즈>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듄 파트 1>은 필자 기준 8점이다) 하지만 <듄 파트 2>는 이전 작품의 성공 덕에 제작이 가능해진 이상으로 감독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들어갔다. 이는 의상에서부터 관찰할 수 있다. 하코넨 가문의 병사들의 전투복과 그들이 이끄는 전투함과 전투기 등은 각종 벌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을 반영하였다. 그리고 파트 2에서는 이를 더욱 반영하여 헬멧 부분에 곤충의 눈과 같은 육각형의 선들이 그려져 있으며 각종 장비들이 더더욱 곤충과 같은 디자인이 되었다.
이처럼 감독의 권한이 늘어났다는 것은 동시에 감독이 보여주고 전달해주고 싶은 메세지가 더욱 강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메시지는 더욱 강해졌다. 바로 종교에 대한 의구심과 이로 인해 태어나고 만들어진 영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차가운 의심이다. 주인공 폴 아트레이디스가 영웅으로 각성하기 앞서 그는 많은 부담감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역경은 바로 스파이스를 통해 본 미래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스파이스를 통제하고 다스리기 시작하면 많은 가문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그를 상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각성한 능력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무찌르면서 결국에는 스파이스를 점령하는 은하계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몇 백이 굶어 죽으며 몇 억이 죽을 미래를 이미 관철하였다. 그런 그에게 이런 미래는 너무나도 거대하게 느껴지며 스스로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그가 부정하여도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처럼 그는 능력을 각성시키고 사막의 프레멘들을 데리고 황제를 누르고 그 자리에 앉게 된다. 물론 이후 대가문들과의 성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황제까지 고개를 숙이게 한 인물로 각성한다. 하지만 영웅의 탄생에 대해 감독은 그를 절대로 환영하지 않는 듯이 연출한다. 그것도 폴의 연인인 챠니 카인즈를 통해서 말이다. 챠니는 등장하였을 때부터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 현실주의적 인물이다. 그녀는 남쪽 프레멘 부족들이 믿는 종교적 믿음보다 지금 눈 앞에 있는 현실, 계속해서 침략을 받으며 적들을 무찔러야 하는 현실을 보다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폴 또한 각성하기 전 그녀와 함께 본인은 메시아, 구원자가 아님을 믿으며 그녀와 함께 싸워 나아간다. 하지만 폴이 본인의 각성을, 구원자가 되어야 함을 받아들이면서 그녀는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동시에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바뀌었다. 게다가 그의 각성에, 구원에 계속해서 의심을 던지고 부정하는 그녀는 영화에서 소외되어 보이지는 이는 사실 감독과 원작 소설 프랭크 허버트의 시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듄은 영웅의 탄생의 이야기인 동시에 영웅의 몰락의 이야기이도 하다.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는 한 명의 영웅, 한 명의 초인에 대한 극도의 위험함을 주장하였다. 과연 한 명의 초인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아무리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이끄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를 원작 듄은 묻는다.(원작의 1,2권만 취급한다면 말이다) 최선의 길과 옳은 길은 다르듯이 최선의 길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옳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결과를 낼 수도 있다. 그리고 감독은 원작에 대한 존경과 배려심을 담아 폴의 영웅사를 챠니의 시선으로 차갑게 담아낸다.
미래를 배경하고 있지만 종교적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를 누군가는 종교와 반대되는 과학적 세계관을 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종교건 과학이건 믿음의 또 다른 형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다른 세계관에 종교의 근원부터 풀어 나아갔다는 점에서 듄은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호불호가 생긴다면 그건 바로 폴의 서사에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사전에 이를 방지할 장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폴의 각성에 그리고 그의 선택에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 그가 위치한 상황과 그가 상대하고 있는 적들을 알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가문의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치적 죽음을 당했으며 베네 게서리트라는 집단에 의해 그는 메시아라는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각성 후의 능력인 과거와 미래를 보는 능력은 영화에서는 크게 두들어지게 연출되어지지 않아 그에게 공감할 다리가 준비되어있지 않다. 물론 이를 멋들어지게 연출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감독의 의도대로 이를 멋지게 연출하면 멋진 서사시의 시작이 되어버린다. 감독은 결코 위대한 서사시를 원하는게 아닌, 영웅의 몰락을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감독의 의도대로 그는 관객과 폴을 때어 냈지만 그 사이를 이어줄 대체제를 찾지 못하였다.
게다가 영웅의 고뇌와 그를 압박하는 적들을 그려내는 방법에도 약간의 실망감이 존재한다. <듄: 파트 1>에서 관객들은 블라디미르 하코넨 남작의 압도적인 무력과 잔혹함 그리고 그의 철저한 계획에 감탄을 했다. 게다가 이를 보여주는 연출 또한 화면을 압도하듯이 그려냈다. <파트 2>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풍선에 바람이 빠진 듯이 그는 단순한 폭군으로 바뀌었으며 이를 채워 넣을 그의 조카, 페이드 로타 하코넨 또한 그 자리를 완전히 메꾸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에 더해 황제 코리노 가문의 샤담 4세 또한 그만큼의 압도감 그리고 매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폴의 각성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악역이 자리를 비워 아쉬움이 남는다. 심지어 그 위협적인 샤이 훌루드, 모래벌레 조차 더이상 적이 아닌 라이딩용 펫이 되어버려 사막은 또한 냉철한 악역의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드니 빌뇌브 감독이 평생을 염원하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을린 사랑>에서 보여지는 두 종교의 충돌로 인해 일어난 어머니의 비극. <시카리오>에서 보여주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장면. <컨택트>에서의 색의 미장센과 새로운 문화와의 충돌과 만남.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보여주는 종교적 믿음과 새로운 인류, 포스트 휴머니즘의 탄생 등등 다시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듄에 의한 그리고 듄을 위한 작품들의 탄생이었다. 한 사람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 한 작품이라고 말했듯이 드니 빌뇌브의 모든 작품들은 듄의 부분 부분을 가져다가 그린 작품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그가 염원하던 듄 시리즈는 듄의 어두운 부분까지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이가 <듄 파트1>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지기란 힘들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는 아직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일부에 불과하며 그가 정말로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제작을 준비 중인 <듄 2>(2027년 예상)에서 진짜 서사가 완성이 될 것이다. 언제나 중간은 쉬면서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다만 모래 바람 속에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3줄 요약
1. 듄 '시리즈' 팬이면 추천
2. 요즘의 흔한 영웅 서사시는 아니다
3. 아이맥스가 아니어도 볼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