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 호러 영화의 왕이 돌아왔다 (메가박스 재개봉)
넘쳐나는 미장센 속에 관객을 연출로 풍덩 8/10
(이 글은 영화 전체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후기입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경이로운 롱 테이크로 진행되는 와이드 샷과 웅장한 노래는 관객들을 바로 세계관에 불러오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여준다. 비록 필자가 처음 샤이닝을 봤던 27인치의 저렴한 LCD모니터였음에도 그 때도 지금처럼 노래에 압도되었으며 그 세계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여러 지식들이 쌓여서 영화를 보는 눈이 올라갔다고 생각했지만 샤이닝을 본 이후 바로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파도같이 미장센이 흘러나오면서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주제 의식 또한 깊은 심해에 있는 것 마냥 꽁꽁 숨겨놓아서 관객들은 퍼즐 혹은 미로처럼 주제의식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겠지만 아직까지도 샤이닝에 관련해서 논문이나 평론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감독이 너무나도 영리하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원작가가 열심히 쌓아 올려놓은 탑에서 그냥 마음에 드는 재료만 쏙쏙 빼내어 감독만의 탑을 쌓아 올린 탓에 작가가 영화를 싫어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탑이 생각보다 멋있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정도로 멋있다면? 이렇듯 영화는 소설과는 다른 방향을 추구한다.
필자가 영화에 대해 알아보았을 때 한가지 유명한 이론이 이 영화는 반복되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영화를 다시 보니 여러가지가 보였다. 우선 인디언 묘지 위에 호텔을 지었다는 점. 그리고 들어가자 여러 인테리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인디언 장식 무늬가 맞죠?’라는 질문에 ‘네 맞습니다 나바오 무늬이죠’라고 대답하는 장면. 그리고 영화의 벽에 계속해서 인디언 장식 무늬의 카펫이나 인테리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인디언의 존재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새로 만들었다는 연회장은 금이 떠오를 정도로 밝은 노란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골드 러쉬 당시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리고 인디언들에게 학살과 폭력을 행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웃으면서 턱시도를 입고 있다. 이들은 인디언들을 이용함으로써 부를 쟁취한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위의 노란색이 금 그리고 부를 의미하듯이 스탠리 큐브릭은 색에 대한 미장센을 강박증처럼 지키면서 매 장면들을 색으로 그리고 있다. 필자가 색의 미장센을 가장 경이롭게 느낀 장면은 헤드 셰프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이다. 그는 티비를 보면서 침대 위에 누워있다. 그의 침대에는 초록색 이불과 배게가 있으며 그 위를 파랑색 파자마를 입은 그가 있으며 양 옆으로는 노란색 조명이 그를 비추며 그 위로는 빨간색 그림 속에 그와 같은 흑인 여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초록, 파랑, 빨강, 노랑까지 색을 한 장면 안에 완벽히 그려 넣은 감독이 색이란 미장센을 얼마나 정교하게 사용했는지, 감독으로서 그가 테크닉적으로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 바로 상기시켜주는 장면이다.
영화는 원작과는 다르게 샤이닝에 대한 설명이 일정 없다. 처음 등장부터 토니라는 꼬마의 상상 친구인 것 처럼 가볍게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상상의 친구가 사실은 토니라는 형태의 하나의 다른 인격이며 이는 일반인이 하지 못하는 텔레파시 및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의 진짜 본질을 보여주기도 하며 미래에 대한 경고를 알려준다. 셰프는 자신의 할머니와 텔레파시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며 실제로 아이스크림 먹을래? 라는 질문을 텔레파시로 먼저 보낸다. 그리고 텔레파시는 단순히 메세지 전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멀리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나 그의 시선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쌍둥이를 보자마자 그들의 정체를 바로 볼 수 있는 것 또한 샤이닝의 기능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에 대한 경고는 그가 호텔에 가기 전부터 토니가 계속해서 레드럼이라고 외치면서 경고하고 미래를 보여준다. 만약 샤이닝이 없었다면 그 가족들 또한 1970년대에 일어난 비극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에서는 놀랍게도 샤이닝은 아니지만 호텔에 있는 그 어느 것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장면들이 여럿 존재한다. 처음 시작하는 롱 테이크의 와이드 샷이나 카메라를 옆으로 이동시키면서 찍은 장면들 모두 호텔의 그 무엇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그 무엇의 정체를 누군가는 희생당한 인디언들의 원한이라는 가설도 있으며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어지는 인간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장치라는 말도 있다. 무언가의 반복이라는 점에서는 필자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1921년에 찍은 잭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나 그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 호텔에 온 적이 있다고 언급하는 장면들 모두가 무언가의 되새김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잭이 호텔 밖으로 나오는 장면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가 가족을 데리고 호텔에 오는 차 안의 장면과 그의 가족을 추적하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오는 장면들이 유일하게 그가 호텔 밖에 있는 장면이다. 술을 먹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작가 지망을 하는 아버지였던 그가 호텔에 점차 잠식되어지는 희생양이 된 이유는 그의 폭력성을 호텔이 알아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호텔은 폭력을 공간화 한 장소이며 그러한 공간에 머무르는 폭력적인 사람은 점차 자신을 잃어간다. 그리고 그의 기존의 정신은 연회장 속, 마치 거울 속의 다른 세상에 들어간 듯이 있어 보인다.
그 중에서도 그가 호텔에 자신을 팔고, 내어주는 장면이 그가 바텐더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그가 처음에 당당하게 앉으면서 하는 말은 ‘술만 마실 수 있으면 영혼도 바칠 수 있을 텐데’ 라는 대사 이후 그 앞에 바텐더가 등장한다. 그리고 지갑에 돈이 있으니 술을 내 놓으라고 하지만 그의 지갑 안에는 사실 돈이 없었다. 이를 외상으로 해 달라고 하고 바텐더도 이를 수궁한다. 그 다음 그가 바텐더와 만났을 때 그는 돈을 거절하면서 호텔이 지불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정말로 그가 영혼을 호텔에 팔고 술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궁금한 점은 그가 영혼을 이미 진작에 팔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1921년의 그가 이미 영혼을 팔아 넘긴 것인지 혹은 매번 새로운 육체의 폭력적인 영혼을 파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영화는 여러 의문을 남기며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지만 연출 하나만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앞으로 샤이닝만큼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는 많이 없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나온다면 그 또한 너무나도 기쁜 일이 될 것이리라.